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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산책

아리랑 - 영원한 내 조국-

아리랑을 읽어가는 동안 '포화속으로'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이재한 감독이 스탠포드 대학에서 시사회 할때  누군가가 "인트로 부분에서 지도에 관한 표기가 일본해로 써져있는데 문제가 될 만한 소지가 있지 않은가?”라고 묻자 감독은 “13살 때 처음으로 (일본해 표기 논란) 이슈를 알게 됐고 그 부분은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물론 그는 이 부분이 논란이 되자 급기야 사과를 했지만 다른 영화도 아니고 6.25전쟁에서 학도병을 소재로 만든 영화는 그들의 희생을 생각하자고 만든 영화임에도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버젓이 그런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는 부분이 참 안타깝다. 한국인과 한국영화를 빌미로 할리우드 감독이 되기 위해
 용쓰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리랑에 나오는 친일파와 무엇이 다른가 싶은 생각도 든다. 아리랑 1권을 손에 들고 끝날때 까지 숨이 차도록 읽어 내려갔다. 12권을 다 읽는 동안 어느 한 권 소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고 어느 한 부분 소홀히 넘어갈 데가 없었다. 아리랑은 식민지시대를 깊은 역사인식으로 탐구한 대하소설로 김제출신의 인물들이 
군산, 하와이, 동경, 만주,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옮겨서 40여 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제시대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일제의 폭압에 맞선 우리 민족의 저항과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부각 시키고 있어 민족적 긍지와 자긍심, 자존심을 회복케 하는 역작이다. 총 4부 전 12권의
방대한 분량의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역사이기에 너무 비참했고 소설이기에 너무 재미있었다. 40이라는 이 나이에 일제에 대해 다시금 비분강개 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만한 분량의 책을 민족의식을 담고 왜 요즘은 이런 작가가 나오지 않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올해로 6.25전쟁 발발 60주년이고 한일합방 100주년이 되어 같다. 100여년의 세월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제 일제시대를 몸으로 몸소 겪어내신 분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정말 말로만 듣는 먼 날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의식있는 분들의 책이 많이 많이 나오길 소망해 본다. 그것이야말고 우리가 절대 잊어서도 안되는 살아있는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 것이지 무슨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식민지 역사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흘린 모든 사람들의 공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공평하게 대접되어 민족통일이 성취해낸 통일조국 앞에 겸손하게 비쳐지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런 결론을 앞에 두고 소설 '아리랑'을 쓰기 시작했다. 그건 감히 민족통일의 역사 위에서 식민지시대의 민족 수난과 투쟁을 직시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다. 미래의 설계가 또한 역사다. 우리는 자칫 식민지시대를 전설적으로 멀리 느끼거나 피상적으로 방치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러나 민족 분단의 비극이 바로 식민지시대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는다면 그 시대의 역사를 왜 바르게 알아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 작가의 말 -

제1부 아, 한반도(1권~3권)
우리의 분단역사는 해방 이후의 역사만 왜곡하고 암장시킨 것이 아니라 식민지시대의 역사까지도 그렇게 하기를 서슴지않았다. 제살 깎아내기인 그 어리석음은 남과 북이 서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우매한 것으로 민족정기는 소멸되어 가고, 민족정신은 혼탁해졌으며, 민족자존은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2부 민족혼(4권~6권)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히틀러 정권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들의 수가 얼마나 될까.

유대인들이 주장하기로는 3백만이라고도하고 4백만이라고도한다 그럼 일본의식민치하 36년 동안 일제의 총칼에 학살당하고 죽어간 우리 동포들의 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 3백만일까? 4백만일까? 아니면 6백만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어림숫자마저도 공개되어 있지않고, 공식화 되어 있지 않 다.(중략)

유대인들은 단 3년 동안에 죽어간 것이고, 우리 동포들은 그 열 배가 넘는 세월인 36년에 걸쳐서 죽어갔다. 어느 민족이 더 괴롭고 고통스러웠겠는가?(중략)

유대인 처녀들이 발가벗겨져 독가스실에서 죽어갈 때 우리 민족의 처녀들도 동남아 일대 정글에서 정신대로 윤간당하며 죽어가고 있었던 똑같은 시대다.(중략)

유대인들은 그들의 수난을 극대화하며 자기네 민족의 자존을 확보하는 동시에 미래를 개척하는 민족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과 반대로 살아온 부끄러움을 저질렀다. 그러나 역사를바르게 아는데는 시기의 빠르고 늦음이 없다. 민족은 영원하므로.


제3부 어둠의 산하(7권~9권)

한반도의 인구가 2천여 만이었던 일제 말기에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은 대략 170여 만이었다. 그 수는 전체 민족의 10퍼센트에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자들이 무력을 갖춘 일본총독부의 세력과 야합함으로써 나머지 90퍼센트의 동족을 처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중략)

우리가 다시 식민지가 되는 불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젊은이들 중에서 20퍼센트가 넘게 민족반역자가 될 거라는 예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스럽다. 그러나 그런 상상이 결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의 문제다.


제4부 동트는 광야(10권~12권)

「이제 잊어버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

「이제 용서할 만하지 않느냐.」

「유대인들은 용서했는데 한국은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있을 것이냐.」대충 이런 질문들이었다.

「독일은 수상 빌리브란트가 전 세계를 향해서 시죄를 했고, 유대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사죄를 받아들여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에 도달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독일과 정반대로 교과서를 왜곡하고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계속 망언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용서를 받아야 할 자들이 용서를 빌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것인가. 일본이 독일식의 용서를 빌지 않은 한 우리민족은 '용서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그 동의에 충실하고자 나는 『아리랑』을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