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바다를 그리는 해인사
어린장미
2008. 5. 7. 13:15
지난해 가을 쯤 해인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사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애써 사찰을 찾아 다니는 적극성은 없다. 등산을 가다 보면, 언제나 풍광좋은 곳에는 사찰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인사는 내게 좀 다른 의미로 와 닿는다.
해인(海印)! 그 이름조차도 고고함을 자랑하는 듯 하다. 나에게(누구나 그렇겠지만) 해인사하면, 젤 먼저 떠오르는 것은 팔만대장경이다. 불교 교리를 경장, 율장, 논장의 삼장으로 나누어 종합 편찬한 경전이라는 팔만대장경. 그 불가해한 역작을 떠올리면 해인사는 신비의 경지에까지 오른다.
정확하게는 8만 1,258개의 경판(전체 글자수는 약 5천2백여만자)을 어떻게 제작할 수 있었을까? 조선왕조 태조실록과 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7년 5월12일에서 정조원년 정월 11일까지 9개월에 걸쳐 대장경판이 강화도 선원사에 합천 해인사로 옮겨졌다고 한다.(강화도에서 제작되었다고하는 통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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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경내
다음으로 해인사하면 떠오르는 것이 많지만, 성철 스님을 빼 놓을 수 없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영원한 화두, 장좌불와(長座不臥) 8년!, 그에 대한 일화들은 해인사의 수풀처럼 많은 것 같다. 해인사 백련암을 찾았을 때는, 어느새 백련암도 옛 자취를 찾기 힘들었던 것이 아쉬웠다. 해인사 들머리에 있는 부도탑마저도 현대적인 조각으로 인하여 스님에 대한 기억을 무색하게 했다.
그리고 해인사 뒤 언덕에는 최치원이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 지팡이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의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느닺없이 최치원의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생뚱맞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최치원다운 히스테리가 자라는 나무는 아닐까.
당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하고 ‘토황소격문’으로 이름을 떨친 후 신라로 돌아와 해인사에 은거한 최치원은 뛰어난 천재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이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빛나간 천재성을 얼핏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12살에 당나라로 유학해 입신양명을 욕망했지만, 좌절할 수 밖에 없었던 감수성 예민했던 지식인..
지금도 해인사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숱한 이야기들이 가야산 바람을 타고 경내를 쓸고 있을 것이다. 발길 닿는 사람들은 귀 기울여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