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화엄사

어린장미 2008. 4. 23. 11:17
봄 여행 일번지로 꼽히는 전남 구례. 그 중에서도 안방은 아무래도 화엄사가 아닐까 한다. 화엄사 만큼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사찰도 없었다.

보제루에 앉아 각황전을 보고 있을 때에는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비와 함께 많은 관광객들이 화엄사를 찾았다. 그 발길들은 아마도 백제 성왕22년(544년)부터 시작됐을 거다.

그해 연기조사가 창건하고, 그 후로 자장율사, 도선국사가 증축하였다고 한다. 굵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그 오랜 세월 무상함들을 두들겼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사찰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630년에 벽암선사가 다시 절을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이 1636년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절내에는 마치 석가탑과 다보탑인 냥 동·서 두 개의 탑이 세월을 넘어서 내방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무엇보다 단청이 없는 사찰이 마음에 든다.


화엄사각황전(국보67호)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단청이 없이도 그 화려함은 비길데가 없다.


화엄사각황전앞석등(국보12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와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연기조사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화엄사 흑매
전남 구례 화엄사의 홍매화는 하도 붉게 피어나서 검은색이 돈다고 ‘흑매’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특히, 해질 무렵 화엄사 각황전의 붉은 빛은 고혹적이다. 요즘 흔하게 볼 수 있는 개량 매화가 아닌 토종 매화를 일컬어 고매화(古梅花)라 한다.

찾아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