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하회마을

어린장미 2008. 4. 25. 14:38
낙동강이 섬 모양으로 동·남·서쪽을 감싸 돌고 있는 독특한 지리적 형상이 손잡이 달린 숯불 다리미와 흡사한 하회마을은 전국 십승지(十勝地) 중 하나로 연화부수형 천하길지로도 일컬어 진다. 내가 처음 접한 안동이라는 이름은 역사책도 아닌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에서였다. 극중에서 장군의 어린 아들이 "안동 김씨래"하는 대사를 듣는 순간이 그 느낌이 묘하게 다가왔다(골통들의 동네구나...)

원래 하회마을의 터줏대감은 고려 중엽 맨 먼저 정착한 허씨 문중이라고 한다. 그 뒤 여말선초 공조전서 벼슬을 지낸 풍산 유씨 유종혜가 입향(入鄕)[각주:1]하면서 600여년 전통을 잇는 민속마을로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마을을 구경하다 보면, 가옥들의 고풍스런 한적한 멋스러움들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가옥들의 방향이 동서남북을 향하여 제각각인 것도 현대라는 시간개념들을 사라지게 한다. 그러고 보면 이 곳이 천하길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 많았던 병란들의 참화가 비켜 간 것은 물론이고, 머나 먼 이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까지도 다녀갔으니 말이다. 그 뿐이가, 영화 ‘스캔들’과 드라마 ‘황진이’ 촬영지인 옥연정사까지 그 멋스러움을 자랑하고 있으니.(그러나 하늘이 내리는 사람은 길지도 필요없나 보다. 서애 유성룡[각주:2]은 여기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의성에서 태어났다)

유교의 원형이 그대로 살아있는 도시 안동. 조선 문화가 이렇게 잘 보존된 지역이 또 있을까? 하회마을, 하회탈, 하회별신굿탈놀이, 도산서원, 병산서원, 봉정사, 제비원, 오천유적, 예안향교, 그 숱한 문화적 충격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하회마을 들머리에는 흥겨운 놀이마당이 신명나게 펼쳐진다. 그 질펀한 대사들을 음미하면 화회마을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백정:셋님, 소 불알을 머그만 양기에 억시기 좋으이 데이
선비:머라꼬, 양기에 좋다꼬. 음- 그라만 내가 사지
양반:허허, 야가 아까 날보고 먼저 사라꼬 켓스이께네 이건 내 불알일세
선비:아니, 이거는 내 불알일세
백정:아이쿠, 내 불알 터지니더
할미:쯔쯔쯔, 소 불알 하나 가지고 양반은 지 불알이라 카고, 선비도 지 불알이라 카고, 백정놈도 지 불알이라 카이께네 대관절 이 불알은 뉘 불알이로?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와
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

높이 64m인 부용대 정상에 오르면 물에 떠 있는 연꽃과 같은 지형이라는 하회마을 전경을 볼 수 있다.
 
부용대 좌우에 옥연정사, 겸암정사가 있다. 옥연정사는 1586년(선조 19년) 서애 선생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탄홍(誕弘)스님의 도움으로 지어 문중 자제의 교육과 찾아오는 손님들과의 담론을 나누던 서애 유성룡(1542∼1607)의 별서로 부용대 우측 아래쪽에 동남으로 향하고 있다.

하회마을 서편에서 마을을 돌아 굽이치는 낙동강, 하회마을을 내려가 보며 비경을 연출하고 있는 부용대 좌측 소나무 숲속에 남동향을 보고 서 있는 겸암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맏형인 겸암 류운룡(1539~1601)이 1567년(명종 22년)에 학문 정진과 제사 양성을 목적으로 지은 정사이다. 정사에서 내려다보면 강건너 모래사장과 송림 그리고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애는 정계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서 기거하며 당시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전란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는 ‘징비록’(국보 132호)[각주:3]을 집필했다.



충효당
(보물 제414호)

서애 유성룡 종가 충효당은 하회마을 안에서도 용맥이 내려와 멈춘 곳에 지어졌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유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유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다. 행랑채는 8대손 일우 유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정동향 대문 앞에는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곳을 방문해 심은 주목이 잘 자라고 있다. 의성에서 태어난 서애가 성장기를 보내고 벼슬길을 내던진 뒤 분을 삭이며 만년에 은거한 곳이다.


양진당
(보물 제306호)

양진당은 겸암 유운룡(1539∼1601)의 집으로 매우 오래된 풍산 유씨 종가이다. 입암 유중영(1515∼1573)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유중영은 유운룡의 아버지이다. 양진당은 유운룡의 6대손 유영(1687∼1761)의 어릴 때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3칸은 대청,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바깥 주위에 툇마루와 난간을 둘러 마치 누(樓)집과 같은 인상을 주며 대청에는 문을 달아 3칸 모두 열 수 있게 하였다. 건물 안쪽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한석봉이 쓴 ‘양진당(養眞堂)’이란 당호와 함께 여러 현판들이 걸려 있다. 건물 안쪽 일부 재료를 만든 수법이 뛰어나고, 일반 주택으로는 제법 규모가 큰 조선시대 별당건축물 중 하나이다.

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


만송림
하회마을까지 와서 안 보고 가면 섭섭한 곳. 서애 친형인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1539∼1601)이 식재한 소나무들이다. 마을 서쪽에서 불어오는 살풍을 막아 기를 보호하고 모래 바람을 막기 위해 1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는 ‘만송림’이다. 입향조인 전서공, 또는 서애가 식수했다고도 전해지기도 한다.



찾아가는 길

승용차편: 안동시내에서 예천방면 국도로 약 30분 소요,
중앙고속도로 서안동 톨게이트에서는 역시 예천방면으로 약 15분 소요

사진출저 : <경북도청 경북나들이>
  1. 입향조 전서공이 이 마을에 정착하는 데는 남모를 텃세와 고초를 겪어야 했다고 한다. 집을 지으려고 주초(柱礎)를 세울 때마다 까닭 없이 무너지고, 우물을 파면 불순물이 섞여 먹지 못할 물이 치솟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서공은 기이한 꿈을 꾸게 된다. 도인 스님 한 분이 나타나 “공덕을 쌓지 않고서는 이곳에 자리 잡을 수 없다”고 현몽하고는 사라졌다. 스님의 권유대로 먼저 살던 마을에 가 수년간 덕을 쌓은 후 다시 와 터를 잡으니 무탈했고 그 뒤부터 많은 유씨가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풍수지리학의 최종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 적덕지가(積德之家·덕을 쌓는 집안에) 필유여경(必有餘慶·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의 큰 뜻이 담겨져 있다. [본문으로]
  2.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본문으로]
  3. 징비록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유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징비록』은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1647)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1695) 일본 경도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었으며, 1712년에는 조정에서『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았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난중일기』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