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룻배 한 척이 강을 건너고 있다. 아직은 뺨에 시린 강바람을 가르며 물살을 헤치는 나룻배에는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 삐거덕삐거덕 노 젓는 소리가 왠지 무겁게 들린다. 그게 마치 그 덩치 때문이기나 한 듯 우람한 몸짓의 사나이도 끼어 있다. 그는 아까부터 쉼 없이 떠들어대고 있는 한 사내를 이맛살을 찌푸리며 지켜보고 있다.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서 떠벌리고 있는 사내는 풀잎을 지근지근 씹어 가며, 그 풀물을 퉤, 퉤, 뱉으면서 한창 신바람이 나 있다. 드물게 볼 정도로 못 생긴 얼굴이 어찌 보면 당나귀와 흡사했다. 그러나 눈빛은 형형하여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서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요모조모 눈여겨 살폈을 때의 인상이고, 언뜻 보기엔 영락없는 팔푼이 아니면 덜떨어진 망나니였다. - 제1편 상판은 당나귀 중에서 -
'계유정란'이라는 피바람을 일으키며 나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수양대군을 임금의 자리에 반듯하게 올려놓은 지지리도 못난 칠삭동이 한명회. 세조가 '공은 나의 장자방이다'라고 부를 만큼 아끼고 또 아꼈던 한명회는 과연 뛰어난 지략가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명예와 이익만을 쫓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모리배였을까?
한명회의 삶과 정치철학을 꼼꼼하게 그려낸 이 책은 철저한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200여 명의 실존 인물들을 통해 한 시대 역사의 진실을 사실 그대로 그려낸 대하역사소설이다. 이 책은 어느 누구보다도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칼끝에 묻힌 핏빛 원한은 역사와 더불어 끊임없이 되새겨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나는 소설 한명회를 읽고 있지만(92년도) 개정판이 나왔던 모양이다. 같은 작가 신봉승(73)이 쓴 난세의 칼(모두 5권, 도서출판 선)이 그것인데 이 책을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난세가 되면 하늘은 호걸을 소명하여 부리지만, 그들의 임무가 끝났다고 믿으면 가차 없이 버린다"라는 명구가 가슴에 와 닿는다
1. 상판은 당나귀
2. 독으로 술을 마시다
3. 대호(大虎)가 말하기를
4. 양녕대군의 진노
5. 사랑과 야망
6. 떠돌이가 모여서
7. 칠삭동이 송도로 떠나다
제2권
1. 당나귀의 헤픈 웃음
2. 임금은 열두 살
3. 운명의 만남
4. 지붕을 성글게 이으면
5. 인질(人質)을 잡아서
6. 역사의 조건
7. 짜여지는 판도(版圖)
작가 신봉승은 1933년 강릉에서 태어나 1957년 <현대문학>에 시 '이슬'을, 1961년 같은 문예지에 문학평론 '현대시의 생성과 이해'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초당동 소나무 떼><초당동 아라리>가 있으며, 장편역사소설로는 <대하소설 조선왕조 5백년>(48권) <소설 한명회>(7권) <왕건>(3권) <조선의 정쟁>(5권) <이동인의 나라>(3권)가 있다.
그밖에 <직언><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양식과 오만><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학생부군과 백수건달><성공한 왕 실패한 왕><시인 연산군> 등의 역사에세이와 < TV드라마 시나리오 창작의 갈라잡이>를 펴냈다.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거쳐 지금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추계예술대학> 영상문예대학원 대우교수로 있다.